주일오전설교

롬12장11절13절 신앙의 방향, 열심 그리고 멋 170326 주일오전

smileyong 2017. 3. 26. 13:15

121113절 신앙의 방향, 열심 그리고 멋 170326 주일오전

 

이제 완연한 봄날입니다. 군데군데 꽃들이 피기 시작했는데, 여러분 마음속에도 아름다운 믿음의 꽃들이 피어나시길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 여러분들은 어떻게 믿음으로 사셨습니까?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믿음으로 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이론에다가 실천을 더해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에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으로 믿고, 또 제대로 입술로 고백했는지,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삶속에 실천해야 그 사람의 믿음이 비로소 확증되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저는 제가 지난주에 한 설교 때문에 좀 불편하게 살았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을 하자고 말씀드리면서 가면을 벗자, 그리고 뒷담화를 하지 말자고 했는데, 제 아내와 이야기하면서도 혹시 내가 뒷담화를 하는 것은 아닌가? 좀 불편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불편을 느끼신 분들이 있을 텐데, 이런 분들이 설교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쓴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남의 말을 너무 쉽게 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뒷담화를 삼가시고 그 사람이 없는 자리에서는 칭찬만 하시길 바랍니다. 또 제가 사랑은 내가 먼저 서로 서로 하자고 설교했는데, 그 실천으로 지난주에 보문산에 올라가면서 인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어폰을 끼고 가는 분들에게도 큰 소리로 인사하니까 다들 반갑게 인사를 받으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이제까지 해왔던 대로가 아니라 말씀에 통제를 받으며 말과 행동을 다듬어 가시길 축원합니다. 이것이 예배당 밖의 삶의 예배입니다.

또 지난주에 제가 모범적인 예배자는 예배시간에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말씀드렸는데, 기억하십니까? 특히 설교시간에 눈은 초롱초롱하고, 입엔 아멘 아멘하며,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말씀을 능동적으로 듣는 태도입니다. 지금 이 시간 설교 들을 때 여러분의 눈은 초롱초롱, 입엔 아멘 아멘, 얼굴엔 미소가 번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요약해서 한 문장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요약해 보니 주님을 향하여 열정을 가지고 멋지게 신앙생활 합시다.’입니다. (주님을 향하여 열정을 가지고 멋지게 신앙생활 합시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의 세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 주님을 향하여입니다. ‘주님을 향하여는 우리 신앙의 방향을 일컫는 말입니다. 두 번째 열정을 가지고는 신앙의 속도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멋지게 신앙생활 합시다.’는 신앙의 열매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앙의 세 가지 요소가 잘 조화를 이루는 균형 있는 성도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1. 첫 번째 신앙의 방향입니다.

본문 11절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본문에서 신앙의 방향은 주를 섬기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분명한 신앙의 목표와 대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신앙생활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인생의 제일 된 목적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입니다.’ 우리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 다른 말로는 인생의 방향과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엔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과 방향은 주를 섬기는일입니다. 이 신앙의 방향과 목적이 우리가 살고 있는 말세에 많이 흐트러져서 헷갈립니다. 그 이유는 종교다원주의 때문입니다.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란 문자적으로 여러 다양한 종교들에 대한 주의, 주장을 의미합니다. 좋게는 모든 종교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취지이지만 부정적으로는 기독교의 진리를 왜곡 부정하는 주의입니다. 예를 들면 종교다원주의자들은 보문산의 정상 시루봉은 하나지만, 시루봉에 올라가는 길은 여러 갈래 길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사정공원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청년광장에서 올라가는 길이 있고, 또 보문산 오거리에서 올라오는 길이 있고, 호동이나 옥계동에서 올라오는 길도 있고, 이사동전망대를 통해 올라가는 길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로 올라가던지 결국은 시루봉에서 다 만나게 된다는 것이 중교다원주의자들의 주장입니다. 듣고 보면 아주 그렇듯 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구원의 유일한 길 되시고, 진리 되시고,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일종의 반기독교적인 주장입니다. 이런 종교다원주의가 득세하는 말세에 여러분들은 정신 차려 기도하여, 우리 신앙의 방향과 목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4:12절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예수 외에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또 히브리기자는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했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여기도 진리, 저기도 진리라고 우기는 말세에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고 따라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 말 성경엔 주를 섬기라고 하니까 섬기는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데, 본문에 섬기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둘류오(δουλεύω)라는 단어입니다. 둘류오라는 단어의 어원은 종, 노예를 뜻하는 둘로스(δολος)에서 나왔습니다. 즉 주를 섬기라는 말은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명확한 위계질서 즉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관계를 설정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고, 나는 그의 종이라는 관계가 제대로 설정되면 자동 나는 예수님의 종으로서 역할을 하게 되는데, 바로 그게 오늘 본문의 주를 섬기는 행동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묻습니다. 여러분들은 주인인 예수님을 지금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섬기고 계십니까? 아니면 예배와 성경읽기, 기도를 종종 뒤로 미루면서, ‘예수님 안녕하세요? 나 오늘 바빠요? 안녕히 계세요.’라고 홀대하십니까? 노예나 종은 자신이 바쁘다고 주인의 일을 내팽개치고 자신의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충성된 종이라면 예수님!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 오늘 예수님이 저에게 무슨 일을 시키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습니다.’ 이래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종이나 노예가 군기가 너무 빠져서 주인 머리 꼭대기에서 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가정과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극상이란 말이 예전엔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일어나도 어쩌다가 한 번 일어나는 일이었는데, 이제는 사회나 가정에서 하극상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교회 안에서도 심지어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하극상이 너무나 종종 일어나고 있습니다. 분명이 우리의 입으로는 예수님을 나의 주인님이라고 고백하고, 나는 예수님의 종, 노예라고 말하지만 실제 행동은 내 마음대로(예수님을 하인 다루듯이) 행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전에 먼저 내가 누구이고, 주님은 어떤 분인가?’라는 위계질서를 잡고 그 후 일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는 예수님의 종입니다) 종은 오라고 하면 오고, 가라고 하면 가고, 하라고 하면 해야 합니다. 이게 뭐라고요? 우리 신앙의 방향이고, 예수님을 온전히 섬기는 행동입니다.

 

2. 두 번째 우리 신앙의 방향이 주님께로 바로 잡혔다면 그 이후에는 속도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열심입니다.

다시 본문 11절입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앞부분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까지가 우리 신앙의 속도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열심이란 단어는 헬라어로 제오(ζέω)라는 단어인데 물이 끓다, 불이 타다란 뜻입니다. 여러분 신앙의 열정이 지금 물이 끓듯이 펄펄 끓고, 불이 타듯이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입니까? 3:15,16절에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또 에베소 교회를 향한 주님의 책망은 무엇입니까? 2: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첫 열정이 식어 버린 교회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뜨뜨미지근한 교회라고 책망했습니다. 이런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는 주님은 토해버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여기 고급 승용차가 있다고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고급 승용차라도 시동을 켜지 않고는 출발할 수가 없습니다. 또 시동만 켰다고 자동차가 가는 것이 아니라 기어를 넣어야 갑니다. 요즈음은 대부분 오토메틱(자동 기어)가 장착되어 있지만, 수동 기어인 경우 1단을 넣어야 차가 출발하는데, 1단 기어를 넣고는 아무리 가속 페달을 밟아도 속도가 나질 않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신앙의 기어가 1단에 머물러 있다면, 2, 3, 4, 5단 요즈음은 7, 8단 기어도 있다고 합니다. 7, 8단까지 올려 전속력으로 달려가시길 축원합니다. 그렇다고 과속하고는 교통순경한테 우리 목사님이 기어를 최고로 올리라고 해서 올렸다고 말씀하지는 마시고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열심은 다른 말로 부지런함을 말합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현대인들이 교회 봉사 좀 하시지요? 성가대, 교사 좀 하세요? 구역예배 드리시지요? 식당 봉사 하세요.’ 하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 줄 아십니까? ‘바빠요? 시간이 없어요.’ 그런데 부지런한 사람은 시간이 없다. 바쁘다란 말을 하지 않습니다. 바쁘다, 시간 없다는 말은 좀 노골적으로 말하면 교회 봉사하기 싫다는 소리입니다. 제가 너무 정곡을 찔렀나요? 아니! 새벽기도 하는 사람은 25시를 받았습니까? 누구나 공히 24시간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런데 누구는 새벽기도에 봉사까지 다 하는데, 누구는 봉사할 시간이 없다고 합니까? 그 이유는 내가 누릴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희생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앞서 말씀드린 종과 노예의 자세가 아니라 내가 주님과 동등 된 위치에서 예수를 믿겠다는 사람입니다. 좀 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교양과 종교요식행위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열심은 우리의 시간과 상황과는 상관없이 진행되어야 합니다. (아멘) 즉 주님을 향한 열심이란 말은 다른 것을 희생하고 오로지 주님께만 내 마음과 정성과 심지어 생명을 드리는 행위입니다. (시간 없다 바쁘다 말하지 말고, 처음 사랑으로 주님을 섬깁시다) 이게 열심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신앙의 멋과 맛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신앙의 방향과 열심에 초점을 맞추어 목회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저도 신앙의 본질인 방향과 속도뿐만 아니라 방향과 속도를 이루는 행위 혹은 밖으로 풍기는 신앙의 향기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잡스는 디자인을 매우 강조했던 사람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디자인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디자인은 재미있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외관을 꾸미는 것이 디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깊이 파고들면 디자인은 제품의 작동 방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디자인을 잘하려면 본질적인 부분까지 파고들어야 합니다. 그 제품의 진정한 속성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품의 본질을 꿀꺽 삼키는 것이 아니라 꼭꼭 씹어 먹듯 철저하게 파악하려면 열정이 필요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만큼 시간을 들이지 않습니다.” 스티브 잡스<프레젠테이션의 비밀>p.126. 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말씀으로 표현한다면 우리의 행동이 가식이 아니라면 겉으로 드러난 신앙의 멋과 맛은 본질을 녹여 내린 엑기스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예전에 말과 표현을 좀 못해도 진실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프로는 기본은 물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로 프리젠테이션으로 남들에게 잘 전달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어떤 분들은 공부를 많이 해서 많이 알고 있는데 남에게 설명을 잘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은 죄송하지만 많이 모르는 분이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잘 정리하지 못하는 분입니다. 한마디로 본질도 부실인 분입니다. 즉 우리의 신앙의 본질인, 방향과 열심이 있다면 신앙의 멋은 자동 따라와야 정상입니다. 이제까지 제가 한 설교를 분석해 보면 신앙의 방향과 열심에 대하여 많이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의 핵심은 방향과 열심보다 이 두 가지를 어떻게 녹여서 하나님 앞과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있는가? 바로 여기에 강조점을 두고 싶습니다. 이것을 저는 신앙의 멋 혹은 맛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 안에 ! 저 장로님 멋지다.’ ‘! 저 권사님 멋지다.’ ‘저 집사님, 성도님 멋지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저는 심각하게 교회를 둘러보고, 저 자신도 돌아보았습니다. 저도 성도들에게 우리 목사님이 멋지다.’란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저도 이제 50대 중반을 넘어 섰으니 외모로 멋지다란 소리를 듣기는 글렀고, 이제 신앙의 멋은 내면에서 풍겨나야 하는데, 멋은커녕 목사님이 거짓말쟁이다.’ ‘목사님이 주책스럽다.’ ‘목사님이 예민하고 신경질적이다.’ ‘목사님이 사랑이 없다.’ 이런 소리를 들을까 염려가 됩니다. 성경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았던 성경의 위인들이 있는데, 예를 들면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란 칭찬을 받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입니다. 얼마나 멋집니까? 또 아브라함은 다윗 이상으로 멋진 사람이었습니다. 22:12절에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이렇게 인정했습니다. 또 노아는 당대 의인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다윗, 아브라함, 노아 등등 성경엔 믿음의 멋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두 다 믿음의 멋쟁이들입니다.

신앙의 멋이 오늘 본문 12절에 기록되어 있는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입니다. 본문 12절에서 신앙의 멋을 3가지 찾아 볼 수 있는데, 1) 첫째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이고, 2) 둘째는 환란 중에 참으며, 3) 세 번째는 기도에 항상 힘쓰며입니다. 3가지가 믿음의 방향과 열심을 녹여서 만든 신앙의 멋입니다.


1) 첫 번째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에서 즐거워하며는 헬라어로 카이로(χαίρω)라는 단어입니다. 카이로의 뿌리는 은혜라는 카리스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즉 즐거워한다는 말은 카리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을 때 나오는 감정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의 대표 감정은 기쁨, 즐거움입니다. 다른 말로 신앙생활을 멋지게 하는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은 사람이고, 그 은혜로 마음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너는 왜 항상 웃니 슬퍼도 눈물 나도, 남들은 모를 거야. 왠지 좋아 항상 좋아. 무엇이 그리 좋으니, 나도 알게 해 다오. 너와 나 만나려고 주 예수님 오셨단다. 참 기뻐 왠지 기뻐서, 항상 웃고 항상 찬송. 정말 좋아 왠지 좋아 또 기뻐서 찬송하네.’ 슬퍼도 눈물 나는 일이 있어도 항상 웃는 사람이 신앙에 멋진 사람입니다. 이미 우리는 롬12:1절에서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배웠습니다. 신앙의 방향과 본질인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신앙의 멋입니다. 또 구약 시편2:11절에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의 방향과 온전한 열심이 있으면 당연히 신앙의 멋인 즐거움이 따라와야 정상입니다.


2) 두 번째 신앙의 멋은 환란 중에 참으며입니다. 로마교회는 바울 사도로부터 로마서를 받은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네로 황제의 큰 박해를 당합니다. 그런데 로마교인들은 원형경기장에 사자 밥이 되면서도, 끝까지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환란 중에 짜증내거나 인상 쓰지 않고 죽음 앞에서도 끝까지 참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편지하면서 사랑은 15가지 속성을 기록하면서 제일 먼저 사랑을 오래 참고라고 했던 것입니다. 환란 중에 참는 성도가 멋진 사람입니다.


3) 마지막 세 번째 멋있는 그리스도인은 기도에 항상 힘쓰는사람입니다. 세상의 멋과 맛은 쉬 유행을 타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은 늘 예수의 향기가 나는 멋진 사람입니다. 여기 왜 바울사도가 기도에 항상 힘쓰며 했을까요? 기도는 아무리 습관이 들었어도 힘쓰지 않으면 기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항상 하려면 의도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멋지고 향기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고 하는데, 기도를 하면은 영혼이 예뻐집니다. (기도를 하면은 영혼이 예뻐집니다)

그런데 신앙의 방향과 목표가 뚜렷하여 주님을 향하고 있고, 열심으로는 새벽기도회부터 각종 예배에 참석하고, 교회 봉사라는 봉사는 다 하는데, 어딜 가든지 싸우고, 늘 인상을 쓰고 다니고, 신앙의 멋과 맛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 볼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런 사람들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관계보다 일을 치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를 들면, 예배드리는 것, 봉사하는 것, 기도하는 것. 이 모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인상 쓰고, 봉사하면서 혈기를 내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와 형제우애는 뒤로 하고 사역이 일이 된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은 일이 잘되면 하하 웃지만, 일이 꼬이면 인상 쓰고 화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교회 봉사를 일로 하고 계십니까? 즐겁게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어떤 목적을 이루시려고 하고 계십니까? 지금 설교 듣는 것도 일입니까? 아니면 설교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과 깊은 관계를 맺길 원하십니까? 이 시간 스스로 나는 신앙의 멋이 있는 사람인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멋은 무슨 멋이여! 그냥 믿다 천국가면 되지 하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저도 예전에 그랬습니다. 좀 일 못해도, 좋습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사랑과 예수의 행기가 발하는 멋진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합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나의 신앙의 좌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목사인가? 아니면 교회만 크게 부흥 시키려는 성장에 목을 매는 목사인가? 또 주님을 섬길 때, 주님과의 관계보다, 일에 성패에 따라 웃고 울지는 않는가? 또 내가 교회 지도자로 남에게 지시만 하는, (종의 위치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있지 않은가? 또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데 열정을 다해 불이 활활 타오르는 뜨거움을 가지고 감당하고 있는가? 아니면 마지못해 목회를 하지 않은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멋지게 목회하는 목사인가? 아니면 일에 찌들어 있는 목사인가? 돌아보았습니다. 여러분도 신앙의 3 요소(신앙의 방향, 열심 그리고 멋)이 잘 어우러진 성도인가 점검하시고 신앙의 멋진 성도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둘씩 짝을 지어 옆사람 보고 (멋지십니다!)